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사누르에서 배웠다
사누르에서의 일상은 평화로웠다. 친정부모님이 한국으로 돌아가신 뒤, 발리의 남동쪽 해안 마을 사누르에서 선규와 단둘의 시간이 시작됐다. 바투르 산 일출도, 울루와뚜의 절경도 뒤로한 채,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며칠이 우리 앞에 남아 있었다. 조용하고 느린 동네에서 아무 계획 없이 지내는 일. 생각만 해도 숨이 트였다.
사누르는 꾸따나 스미냑 같은 북적이는 관광지와는 결이 다르다. 오래된 마을 특유의 정취와 로컬의 삶이 공존하는 이곳은, 한때 발리에서 가장 먼저 관광지로 개발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엔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보다는 그저 걷거나 멍하니 앉아 있는 이들이 많다. 파도는 격렬하게 밀려오지 않고, 해안선을 따라 잔잔하게 미끄러질 뿐이다.
우리가 일주일간 머물기로 한 숙소는 ‘더 101 오아시스 사누르(The 101 Oasis Sanur)’. 큰 리조트는 아니지만, 내부에 길게 뻗은 수영장을 중심으로 객실이 둘러서 있어 구조가 단정하다. 오랜 고심 끝에 고른 억새스풀 룸은 문만 열면 바로 물로 이어졌다. 선규는 도착하자마자 수영복으로 갈아입었고, 짐 풀기도 전에 첫 물장구를 쳤다. 그날 이후로도 거의 매일 아침, 그리고 오후엔 어김없이 물놀이가 이어졌다. 물에서 나올 때마다 손끝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호텔에서의 하루는 정해진 듯 정해지지 않은 루틴으로 흘렀다. 아침엔 호텔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조식을 먹고 오전엔 수영, 점심엔 방 안에서 낮잠, 오후엔 다시 수영. 가끔은 근처 마트에서 간식을 사거나, 호텔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놀랍도록 단순하고 느슨한 하루였지만, 그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잘 맞는 속도였다.
때때로 선선한 바람을 따라 숙소 밖으로 나섰다. 도보로 10분쯤 걸려 도착한 사누르 비치(Sanur Beach)는 발리의 다른 해변과는 확연히 달랐다. 서핑보다는 산책이 어울리는 곳. 모래사장도 조용했고, 해안 산책로는 해변 옆을 따라 나무 그늘 아래 길게 이어졌다. 새벽부터 열리는 해변 시장을 지나, 현지 아이들이 줄지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조용히 걸었다. 바다는 한결같이 잔잔했고, 바다 끝 어딘가에는 로비나 쪽으로 넘어가는 전통 배가 떠 있었다. 사누르의 바다는 마치 이야기 한 자락을 품고 있는 듯했다. 수십 년간 이곳을 오가던 외국인 여행자들의 기억, 마을 주민들의 생업,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모두 겹겹이 쌓여 있는 느낌. 그래서일까. 이곳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채워졌다.
밤이 되면 호텔 수영장 물결이 조명 아래 은은하게 흔들렸고, 방 안으로는 풀벌레 소리와 함께 잔잔한 인센스 향이 스며들었다. 그런 밤이면, 선규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조용히 하루를 복기했다.
“오늘 뭐가 제일 좋았어?”
“수영했을 때. 내일도 또 하자.”
그 대답 하나면 충분했다.사누르에서의 일상은 특별할 것 없는 반복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느슨한 리듬 속에서 진짜 여행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보다는, 오래 머무는 공간이 마음을 더 깊이 적신다는 걸. 시간이 천천히 흐를수록 더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는 걸. 우리는 그렇게 사누르에서 여름의 끝자락을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오히려 그 시간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을 것 같았다.
Tip. 사누르 지역 추천 레스토랑
1. 브라세리 리퍼블리크(Brasserie République)
사누르에서 보기 드문 클래식한 프렌치 브라세리. 검은색 셰이드 조명과 앤티크한 가구, 정갈한 테이블 세팅이 파리의 어느 작은 골목 레스토랑을 연상케 한다. 오징어 구이와 덕 앙 오랑즈(Duck à l’orange) 같은 정통 메뉴는 물론, 장작 화덕에서 갓 구운 피자도 인기다. 와인 한 잔과 함께 즐기는 저녁 식사는 그 자체로 근사한 하루의 마무리가 된다.
2. 나가 에이트 레스토랑(Naga Eight Restaurant)
나가 에이트 레스토랑은 열대 정원 속 발리 전통 건축미를 살린 공간에 자리 잡은 고급 중식 레스토랑이다. 붉은 기와와 조형미 있는 기둥 아래에서 딤섬, 북경오리, 해산물 스프 등 정통 광동식 요리를 맛볼 수 있다. 특히 일요일에 운영되는 ‘Yum Cha’ 브런치는 현지 가족 단위 손님은 물론, 입소문을 타고 모이는 여행자들에게도 인기다.
3. 피셔맨스 클럽(Fisherman’s Club)
안다즈 발리 리조트에 위치한 시푸드 전문 레스토랑으로, 눈앞에 펼쳐진 해변과 노을을 배경으로 여유로운 식사를 즐길 수 있다. 갓 잡아 올린 듯한 싱싱한 해산물 플래터, 통새우 그릴, 버거와 타파스 메뉴까지 구성도 다채롭다. 저녁 시간, 해변 위 데이베드에 앉아 칵테일 한 잔을 들이켜면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이 찾아온다.
4. 코스타 바이 몬스타(Costa by Monsta)
사누르 중심 해변에 위치한 지중해 퓨전 레스토랑으로, 감각적인 야외 테이블과 잔잔한 바닷바람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화이트&블루 컬러 톤의 인테리어는 산토리니의 어느 해변을 떠오르게 하고, 요리 역시 허브를 곁들인 해산물 파스타, 양고기 스테이크 등 지중해 감성을 품었다. 해가 질 무렵, 가장 예쁜 사누르를 마주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