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마네카 엣 라사 우붓에서 시작된 시간
우붓에서의 나날은 참 이상했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금세 흘렀고, 그 하루는 이상하리만큼 풍요로웠다. 말하자면 ‘흐른다’기보다 ‘스며든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고요하게, 아주 서서히, 감각의 결을 따라 들어와 어느새 마음 한편을 채우는 그런 시간들.
우붓의 첫 숙소는 코마네카 엣 라사 우붓(Komaneka at Rasa Sayang). 우붓 중심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마치 외부와 차단된 작은 숲속 정원 같은 공간. 바로 앞 도로에는 오토바이가 쉴 새 없이 오가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흘러나오는데, 호텔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 모든 소리가 뚝 끊긴다. 문을 하나 지났을 뿐인데 세상의 속도가 절반쯤 느려진 듯했고, 갑자기 바람이 다정하게 불고, 나뭇잎이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객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것은 발코니 너머로 펼쳐진 풍경이었다. 수직으로 뻗은 나무들이 무성하게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든 햇살은 초록을 더욱 짙고 진하게 만들었다. 그 아래엔 깊은 청록색의 수영장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물빛은 마치 잔잔한 호수 같기도 하고, 풍경 속 그림자처럼 고요했다. 발코니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느긋해졌다. 우리가 도시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이곳은 아주 자연스럽게 회복시켜주고 있었다.
아침이면 햇살이 커튼 사이로 조용히 흘러들어와 잠을 깨웠다. 알람도 없었고, 급한 일도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는 아침. 호텔 조식은 단정하고 정갈했다. 바삭하게 구운 크루아상, 신선한 열대 과일, 은은한 향의 발리 커피. 테이블 위에는 햇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았고, 그 초록빛 풍경을 마주한 채 우리는 긴 말 없이 천천히 식사를 이어갔다. 마치 식사 자체가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그날 하루의 속도와 리듬이 그 아침 식탁에서 결정되는 것 같았다.
오전 시간은 대체로 수영장에서 보냈다. 해가 머리 위로 올라오기 전, 수영장 물은 딱 좋게 데워져 있었고, 사람 한 명 없는 고요한 물속은 아이에겐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는 파도처럼 웃고, 튜브를 타고 둥둥 떠다녔고, 나는 그 옆 데크 체어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맥주를 천천히 마시기도 했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흘러가며 데크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 장면조차 어쩐지 이국적인 연출처럼 보였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 자체가 사치 같았다. 우리가 ‘쉴 틈 없는 삶’ 속에서 늘 갈망하던 것, 그게 여기엔 아무 노력 없이 주어졌다.
하지만 오후의 태양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발리의 한낮은 정말이지, 움직이면 안 되는 시간대였다. 숨이 턱 막히고, 조금만 걸어도 온몸에 땀이 솟는다. 우리는 대부분 점심을 근처 와룽이나 카페에서 간단히 해결한 뒤,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그 후로는 그야말로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즐겼다. 아이와 함께 낮잠을 자기도 하고, 샤워를 하거나, 침대에 누워 다시 책을 펼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도 그 시간은 공허하지 않았다. 오히려 밀도 있게 쌓여가는 느낌이었다.
작은 마트에서 찾은 우붓의 밤
해가 지고, 붉은빛이 나뭇잎 사이로 비칠 때쯤 우리는 다시 외출할 준비를 했다. 주로 향한 곳은 숙소에서 도보 10~15분 거리에 있는 코코마트(Coco Mart)였다. 낮에는 걸어가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뜨거웠던 그 길도, 해가 진 저녁이면 한결 걷기 편해졌다. 아이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며 마주하는 우붓의 저녁 공기에는, 어딘가 향냄새 같은 것이 떠돌았다. 어디선가 향을 피우고 있는지, 혹은 기도를 올리는 중인지, 모호한 연기와 향이 섞여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마트는 아이에게 보물섬 같았다. 형형색색의 포장지와 조잡하지만 반짝이는 장난감들, 낯선 과자와 말린 망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름의 음료들. 나는 그런 아이의 즐거운 표정을 바라보다가, 슬며시 발리산 맥주와 열대과일 젤리를 집었다. 마트는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아니었지만, 우리의 하루를 부드럽게 연결해 주는 리듬 같은 장소였다.
간혹 세탁물을 맡기러 호텔을 잠시 벗어날 때면, 거리엔 또 다른 우붓의 얼굴이 펼쳐졌다. 오토바이가 저만치서 속삭이듯 지나가고,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은 조금씩 어두워지며 푸르름을 걷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하면서도 살아 있는 듯한 밤.
우붓에서의 하루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다. 하지만 그 단순함 안에는 작은 밀도들이 촘촘히 들어차 있었다. 특별한 관광지도, 대단한 이벤트도 없었지만, 우리는 그 하루에 온전히 몰입했고, 아이의 웃음소리와 잎사귀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 수영장의 물 깊이까지 또렷이 기억하게 되었다. 그건 단지 여행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느긋하고 충만한 시간의 시작에는, 코마네카 엣 라사 우붓의 푸르고 고요한 풍경이 있었다.
TIP. 우붓 여행자의 작은 쉼터, 꼭 들려야 할 마트
코코마트(Coco Mart)
우붓 어디를 가도 마주치게 되는 로컬 슈퍼 코코마트는 여행자에게 가장 실용적인 친구다. 시원한 에어컨, 부담 없는 가격대, 그리고 아이들 눈을 사로잡는 알록달록한 스낵과 장난감들. 생수 한 병을 사러 갔다가 낯선 간식, 발리산 과일잼, 모기약, 그리고 향초까지 들고 나오게 되는 곳이다.
델타 드와타(Delta Dewata)
한때 시장이자 현재는 중형 마트 델타 드와타는 우붓의 오래된 정취를 간직한 공간이다. 채소와 향신료가 흙냄새와 함께 쌓여 있고, 생필품과 간단한 주방용품, 간식류는 물론 기념품도 곳곳에 숨어 있다. 관광객과 로컬이 나란히 장을 보고 있는 이 풍경은, 마치 여행자도 이 동네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착각을 준다. 2층엔 작은 전자매장과 의류, 1층엔 슈퍼와 뷰티 용품까지 다양하다.
테피토 마켓(Pepito Market)
보다 세련되고 깔끔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테피토 마켓이 제격이다. 유기농 요거트, 현지 생산 와인, 감각적인 패키지의 잼과 소스들까지. 이곳은 마트이면서도 살짝 ‘델리’ 같은 감성이 있다. 작은 병에 담긴 세계 각국의 맥주를 고르고, 파파야 잎을 넣은 샴푸를 집어드는 그 순간이, 우붓 여행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가 된다.
우붓 전통 예술시장(Ubud Traditional Art Market)
오전 6시 무렵엔 진짜 로컬의 장이 열리고, 오전 9시 이후부터는 여행자를 위한 핸드메이드 기념품의 천국으로 바뀐다. 라탄 가방, 바틱 원단, 나무 조각, 핸드메이드 비누 등 다양한 물건을 만날 수 있다. 조금 덥고, 조금 북적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 우붓의 숨결이 담겨 있다. 가격 흥정은 선택이 아니라 문화. 용기 있게 미소 지으며, 한두 개쯤은 ‘기분 좋은 실패’를 경험해 보는 것도 추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