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대신 숲, 우붓에서 찾은 평온
길리 트라왕안에서의 4박. 모래 위를 걷고, 바닷속을 유영하며, 해가 물드는 노을을 바라보던 날들이 어느새 지나갔다. 작은 섬에서의 시간이 고요하게 접히고, 새로운 장이 열렸다. 오후 1시 15분, 블루워터 익스프레스를 타고 섬을 떠났다. 배가 천천히 바다를 가르고 나아갈 때, 길리를 마지막으로 돌아봤다. 안녕, 작고 깊은 섬. 배는 약 세 시간 만에 빠당바이 항구에 닿았고, 예약해 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지친 몸을 도로에 맡긴 채 창밖을 바라보며 이동한 두 시간. 오후 5시 반 무렵, 드디어 우붓에 도착했다.
피곤함이 목 끝까지 차오른 상태였지만, 우붓의 공기와 풍경은 단숨에 기분을 바꿔놓았다. 길가를 따라 늘어선 짙푸른 나무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갸믹 연주의 소리, 바람결에 섞여 들어오는 향이 처음부터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 바로 이거였어. 내가 상상했던 ‘발리의 정취’라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해변의 활기와는 결이 다른, 조용하지만 깊이 있는 그 무엇. 우붓은 도착과 동시에 나를 사로잡았다.
우붓이란 이름만으로도 풍성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 발리의 중심부, 해안 대신 숲과 계곡이 펼쳐진 이 마을은 자연과 전통, 그리고 감성이 공존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이곳은 발리 전통문화와 힌두교적 종교성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며, 그 위에 예술가들의 감각이 겹겹이 쌓인 곳이다. 1930년대, 발리에 매료된 서양 화가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우붓은 점차 예술의 마을로 거듭났다. 그림, 조각, 춤, 음악이 일상에 녹아 있고, 사람들의 삶이 곧 예술이 되는 곳. 최근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이 이 매력에 빠져 장기 체류를 하며 자연주의적 삶을 실천하고 있다. 요가, 오가닉 라이프스타일, 채식과 명상, 그리고 치유의 여정. 모두가 우붓을 통해 조금은 다른 여행을, 더 깊은 여행을 꿈꾼다.
숙소 체크인을 마치고 짐을 정리한 뒤 잠시 쉬었다. 창밖으로는 초록이 우거진 숲과 그 사이를 흐르는 조용한 저녁 공기가 퍼지고 있었다. 햇살은 조금씩 물러나고, 어둠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오늘 하루는 이동으로 거의 다 지나갔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가볍고 설렜다. 낯선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 느껴지는 약간의 떨림, 그러나 곧 익숙해질 것 같은 기시감. 우붓은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저녁이 되자 배가 고파졌다. 발리에 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한국 음식은 한 번도 못 먹었기에, 조금은 익숙한 맛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선택한 곳은 ‘신씨화로’. 우붓에서도 꽤 평판이 좋은 한식당이다. 갈비살을 구워 먹고, 신라면에 공깃밥까지 곁들이며 제대로 된 한 끼를 마주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한국 음식은 그 자체로 위로다. 익숙한 맛에 피로도 조금씩 가셨고, 마음도 한결 정돈되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바다와 햇살, 모래와 열대과일로 채워졌던 식탁에 비로소 김치와 고기, 뜨거운 국물이 돌아왔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거리는 적당히 어두워져 있었고, 도로 한편에서 오토바이가 가볍게 지나갔다. 걷는 내내 머릿속은 복잡하지 않았다. 우붓의 첫날은 그랬다. 특별한 체험은 없었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가득 찬 하루였다.
지금 이 순간이 발리 여행의 전환점이라는 걸 직감했다. 설레는 시작, 한껏 기대되는 내일. 우붓에서의 여행이 어떤 풍경을 보여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이 공기와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기대할 이유는 된다. 그렇게, 여행의 두 번째 막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열렸다.
Tip. 우붓에서 인기 있는 한국 식당 3
1. 신씨화로(Sinssihwaro Korean BBQ)
우붓의 중심가, Jl. Goutama Selatan No. 2에 자리한 ‘신씨화로’는 바 좌석 중심의 아담한 공간에서 현지 셰프가 한국식 고기를 정성껏 구워주는 곳이다. 매일 오전 11시 30분부터 밤 11시까지 운영되며, 고소한 갈빗살, 촉촉한 삼겹살, 그리고 시원 달달한 비빔국수가 대표 메뉴(예약은 인스타그램이나 전화로 가능하며 +62 877‑0171‑9024)
2. 클라우드 나인 우붓 펍(Cloud Nine Ubud Pub & Co)
Jl. Raya Lungsiakan, 우붓 북서부에 위치한 이곳은 한식과 펍 메뉴가 결합된 캐주얼한 공간으로, 매일 오전 11시 30분 또는 9시 시작해 자정까지 문을 연다. 돌솥불고기, 순두부찌개 같은 정통 한식뿐 아니라 떡볶이, 김밥, 만두 등 안주류와 모히또 계열의 시그니처 음료까지 약 40여 가지 메뉴를 즐길 수 있어,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가 어울리기에 좋다.
3. 사투 망콕(Satu Mangkok)
Jl. Sukma Kesuma No. 17, 펠리아탄 지역에 있는 ‘사투 망콕’은 ‘한 그릇 식사’라는 콘셉트를 갖춘 캐주얼한 한식당이다.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11시 30분–오후 10시 운영하며 월요일은 휴무다. 짬뽕밥처럼 한국인의 속을 달래는 든든한 한 그릇 요리부터, 간푼 치킨과 맥주 세트, 비빔밥, 김치 등 부담 없는 메뉴들이 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