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는 없었지만, 길리는 있었다
길리 트라왕안에서의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길리 트라왕안에서의 마지막 아침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모기장 사이로 햇살이 길게 스며들었고, 이국적인 새소리가 나지막하게 귓가를 두드렸다. 코코넛 나무는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고, 그 잎사귀 너머로 바다빛이 어렴풋이 번졌다. 이제 곧 이 섬을 떠난다는 생각이 들자, 매 순간이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왔다. 작은 소리 하나, 바람의 방향 하나도 마음을 붙잡았다. “터틀 포인트, 가보자.” 마지막 하루를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이 섬의 바다는, 아직 우리를 다 보내주지 않은 듯했으니까.
숙소 앞에서 자전거를 빌렸다. 어제 달렸던 길인데, 오늘은 좀처럼 몸에 감기지 않았다. 모래는 어제보다 더 두껍게 바퀴를 감았고, 햇살은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등을 뜨겁게 눌렀다. 중간중간 자전거에서 내려야 했고, 아이는 자전거 뒷좌석에서 툴툴대는 듯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가면 돼,” 그 말을 되뇌며 몇 번이고 길을 잘못 들었고, 돌아 나와 다시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자 갑자기 시야가 환하게 열리더니, 번화가가 나타났다. 작은 바다 마을의 중심부. 그 풍경은 마치 기다리던 친구가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리는 것처럼 다정했다.
우리는 해변가 바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마자, 해변의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투명한 청록빛 물결이 수면 위에서 햇살을 부서뜨렸고, 그 아래론 산호와 조약돌들이 느리게 반짝였다. 파도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모래를 밀었다가 가져갔다. 멀리 수평선은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흐릿하게 풀어놓은 듯했다. 그곳에선 경계마저 따뜻하게 느껴졌다. 파인애플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왜 이 섬을 힘들게 찾아오는지 알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선뜻 닿지 않는 이 섬의 고요한 풍경은, 어쩌면 일상에 찌든 우리를 위한 마지막 피난처인지도 모르겠다. 숨겨놓은 장소처럼, 아무 말 없이 품어주는 그런 곳. 복잡한 일정표도, 가이드의 설명도 필요 없는, 그냥 ‘머무는 것’만으로 의미가 되는 그런 섬.
우리는 바다로 들어갔다. 발끝에 닿는 모래는 따뜻했고, 물은 부드럽게 몸을 감쌌다. 아이와 나란히 수영하며 바다거북을 찾아보았다. “엄마, 여기 있을까?” 아이는 수면 아래를 들여다보며 속삭였지만, 거북이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서운하지 않았다. 아이의 웃음은 파도보다 더 가볍고, 환했다. 나는 그 웃음 속에서 충분히 보상을 받은 셈이었다. ‘아, 우리는 거북이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이런 시간을 함께하러 온 거였구나.’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처럼 가족 단위의 여행자들이 많았다. 아이를 어깨에 태우고 뛰노는 아빠, 물장구치며 서로를 적시는 남매, 아이가 물장구를 칠 때마다 “조심해!” 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엄마까지. 이곳의 풍경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담담하게 아름다웠다. 누구든 어떤 사연을 품고 와도, 이 바다는 조용히 받아주는 것 같았다. 그 너그러움이 이 섬의 진짜 매력일지도 모른다.
오전 내내 물에서 놀다 보니 어느새 체력이 바닥났다. 햇살은 점점 더 가팔라졌고, 눈이 부셨다. 우리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이 문제였다. 타이어는 모래에 계속 빠졌고, 아이는 “조금만 걷자”는 말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무게중심을 앞에 실은 채 자전거를 밀었다. 햇살은 가혹했고, 땀은 등을 타고 흘렀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벌겋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길을 또 한 번 놓쳤고, 다시 되돌아 나와야 했다. 한참을 땀에 절어 걸으며, 문득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우리가 이래서 이 섬을 또 기억하겠지...” 힘들고, 더웠고, 길을 헤맸지만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그 순간조차도 소중했다. 몸이 고된 날의 기억은, 나중에 더 길게 남는 법이니까.
숙소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이도 지쳤는지 조용히 내 옆에 앉았다. 모래에 묻은 다리를 툭툭 털면서,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햇살과 피로, 바람과 소금기. 그 모든 감각이 몸에, 마음에 얇은 막처럼 들러붙었다. 하루가 아니라, 작은 모험 하나가 끝난 느낌이었다.
해가 기울었고, 방 안에는 느린 바람이 스며들었다. 커튼이 살짝 흔들렸고, 아이는 잠든 채였다. 짐을 꾸리며 조용히 생각했다. 오늘 우리는 거북이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남기고 간다. 누군가는 풍경을, 누군가는 기억을,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다시 조금 알게 된 듯한 기분이었다.
길리 트라왕안은 그런 섬이었다.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머문 시간 자체’로 기억되는 곳. 우리는 함께 웃었고, 바다를 바라보았고, 햇살 아래에서 녹아들었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