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도모 타고 만난 섬, 길리 트라왕안
아침 햇살이 천천히 객실을 채우던 시간. 발리의 마라 리버 사파리 로지에서의 이국적인 하룻밤을 마치고, 우리는 짐을 꾸렸다. 창밖으로 기린이 유유히 지나가는 풍경은 꿈같았지만, 오늘부터는 새로운 여정이 시작된다. 목적지는 길리 트라왕안(Gili Trawangan). 발리 본섬에서 배를 타고 두 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바다 위의 작은 섬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오래 고민했던 곳이 바로 이 섬이었다. 영국 BBC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중 하나로 꼽은 곳, 해변 너머 수평선까지 투명한 바다, 해양 액티비티의 천국,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윤식당 시즌1> 촬영지로도 알려진, 로망의 섬.
하지만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빠당바이 항구까지 이동한 뒤, 다시 스피드보트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한다. 혼잡한 항구, 쏟아지는 호객꾼, 아이를 동반한 여정. ‘굳이 거기까지?’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하지만 결국 마음을 먹었다. ‘불편함마저 여행의 일부’라는 말, 그 말에 기대어.
빠당바이 항구에 도착해 예약해 둔 블루워터 익스프레스 창구를 찾았다. 다른 업체보다 다소 비쌌지만, 아이와 함께라면 시간과 안정이 더 중요했다. 11시 15분, 정시에 보트에 몸을 실었다. 빠르게 뒤로 밀려나는 발리 해안선, 바람결에 머리가 헝클어지는 걸 느끼며 아이는 처음 타보는 배에 신이 난 얼굴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나자, 수평선 너머 작고 평화로운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리 트라왕안은 인도네시아 롬복 인근 세 섬 중 가장 크고 활기찬 섬이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없는 이곳에서는 오직 자전거나 ‘치도모(Cidomo)’라 불리는 말 마차만이 이동수단이다. 섬에 발을 내딛자마자 우리는 치도모에 올랐다. 덜컹이는 바퀴, 말발굽 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스치는 이국적인 풍경들. 모든 것이 느리고 낯설고, 그래서 더 특별했다.
숙소는 번화가에서 떨어진 북쪽 해변 근처의 쿠노 빌리지(Kuno Village). 바닷가와 가깝고 한적하다는 이유로 신중히 고른 곳이었다. 하지만 도착한 순간, 살짝 실망이 밀려왔다. 사진보다 좁아 보이는 수영장, 생각보다 작은 방, 낮에도 빛이 잘 들지 않는 실내. ‘이 선택, 괜찮은 걸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아이는 망설임 없이 “수영장!”을 외쳤고, 짐을 풀자마자 우리는 숙소 앞 풀장으로 향했다. 햇살 아래 수영하는 아이의 웃음소리에 내 불만도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 그렇게 해는 천천히 바다 쪽으로 기울었고, 우리는 바닷가 앞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가 저녁을 주문했다. 촛불 아래에서 먹는 해산물 요리, 바람 소리, 파도 소리, 그리고 섬의 여유로움.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던 순간, 문제가 터졌다.
계산을 하려는데 지갑이 없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방 안, 주머니 안, 아이의 가방까지 모두 확인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지갑 안 카드와 현금, 신분증으로 뒤덮였고, 아이는 “엄마, 왜 그래?” 하고 물었다. 그 말에 정신이 들었다. 핸드폰 결제를 시도했지만 불가. 직원들도 어쩔 줄 몰라하고, 나는 난감한 얼굴로 “숙소에 가서 매니저에게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겠다”라고 말했다. 어찌 보면 황당한 부탁이지만, 그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숙소로 다시 돌아가는 길. 눈앞이 캄캄했다. ‘여행을 이대로 접어야 하나’란 생각까지 들었을 즈음, 숙소 테이블 위에 놓인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날 놀리듯, 아주 평온하게 놓여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미친 듯이 웃음이 나왔다. ‘이런 덜렁이 같으니라고.’
레스토랑으로 다시 달려가 계산을 마치고, 밤바다 소리 들으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 조용한 섬의 공기, 아이의 졸린 눈, 머릿속을 스쳐가는 하루의 모든 풍경들. 오늘도 잊지 못할 이야기 한 장을 만든 셈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여행이란 결국, 이런 일들이 만들어주는 것 아닐까.”
Tip. 발리에서 길리 트라왕안 섬으로 가는 방법
길리 트라왕안은 발리 본섬에서 보트를 타고 가야 하는 섬으로, 사누르, 빠당바이, 렘봉안 등에서 출발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루트는 빠당바이에서 스피드보트를 타는 방식이며, 약 2시간 소요된다. 왕복 요금은 약 140만~170만 루피아 정도(한화로 12만 원에서 14만 원 선). 업체마다 운항 시간, 요금, 무료 픽업 여부 등이 다르므로 사전 비교는 필수다. 예약은 홈페이지나 발리의 현지 여행사를 통해 가능하다.